쓰가루 노부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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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가루 노부후사는 1620년에 태어나 1662년에 사망한 인물로, 히로사키번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의 차남이다. 그는 막부의 관료로 일하며 하타모토가 되었고, 쇼호 소동에 연루되기도 했다. 형 쓰가루 노부요시 사후, 조카 쓰가루 노부마사를 보좌하며 구로이시 번을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노부후사는 구로이시 번의 도시 건설과 산업 진흥에 힘썼으며, 유교적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가신과 영민을 다스렸다. 그는 에도, 히로사키, 구로이시를 오가며 세 가지 역할을 수행했고, 히로사키 번청 일기를 시작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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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사키번 사람 - 쓰가루 히사요
에도 시대의 하타모토 쓰가루 히사요는 히로사키번 4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의 다섯째 아들이자 쓰가루 마사토라의 데릴사위로, 겐분 4년에 다테바야시성의 재번을 명받고 호레키 4년에 은거하여 가독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 히로사키번 사람 - 쓰가루 쓰네토시
쓰가루 쓰네토시는 에도 시대 히로사키번주의 아들로 구로이시 4000석을 상속받아 가문을 이었지만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짧은 기간 동안 구로이시 번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 1620년 출생 - 존 이블린
존 이블린은 17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왕립 학회 창립 멤버로, 방대한 일기는 당시 사회의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며, 『실바』를 통해 환경 보호와 산림 자원 관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620년 출생 - 장 피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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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즈 파스칼은 16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수학, 물리학, 철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확률론, 유체역학 연구, 철학적 사상 등을 통해 과학 혁명에 기여했다. - 1662년 사망 - 심광수
심광수는 조선 시대 남인 산림으로, 척화론을 주장하고 예송논쟁에 참여하여 3년설을 주장하다 유배되어 사망했으나,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청안군에 추봉된 인물이다.
쓰가루 노부후사 | |
---|---|
기본 정보 | |
씨명 | 쓰가루 씨 |
이름 | 쓰가루 노부후사 |
원어 이름 | 津軽信英 |
다른 이름 | 만키치 (유명) 노부이쓰 노부히데 주로자에몬 (통칭)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겐나 6년 10월 5일 (1620년10월 30일) |
사망 | 간분 2년 9월 22일 (1662년11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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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아오모리현구로이시시의 구로이시 신사 |
가계 | |
씨족 | 쓰가루 씨 |
아버지 | 쓰가루 노부히라 |
어머니 | 만텐히메일설에 따르면 만텐히메의 소생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
형제자매 | 노부요시, 노부후사, 노부타카, 사다 노부미쓰, 다메모리, 다이도지 다메히사, 다메후시, 이누이 야스토시, 부, 매, 자자, 마쓰, 고고 외 9남 4녀로 전해진다. 양형제: 다이도지 나오히데 |
배우자 | 야마구치 나오카타 딸 |
자녀 | 노부토시、노부즈미 |
경력 | |
막부 | 에도 막부하타모토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
기타 정보 | |
계명 | 직지 원전 일감료무 대거사 (히로사키 조쇼지) 상광 원전 소월 원심 대거사 (우에노 쓰료인) |
2. 생애
히로사키번의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의 둘째 아들로 에도의 번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마테히메(満天姫)였으나, 다른 사람이라는 설과 마테히메가 아이가 없어 데려다 키웠다는 설도 있다.[2] 1631년, 형 노부요시와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하였다. 1642년, 23세의 나이로 막부의 고쇼구미(小姓組|こしょうぐみ일본어)로서 출사하여 하타모토가 되었다. 도자마 다이묘 가문 출신인 노부후사가 막부의 직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형에게서 1천 석의 영지를 받았다. 1645년, 막부로부터 봉록으로 쌀 300가마를 지급받고 쇼인반(書院番|しょいんばん일본어)에 임명되었다. 이후 슨푸로 출장을 가는 등 막부의 하타모토 경력을 쌓아갔다.
1631년 히로사키 번의 번주가 된 형 노부요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고집불통 나으리'(じょっぱり殿様|조핫파리 도노사마일본어)라고 불렸고, 영지 내 평판도 좋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과 가신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노부요시를 강제로 은거시키고 노부후사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노부후사는 막부 관리로 일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야마가 소코에게 배우는 등 지식과 학식도 높았다. 무술과 문학에도 소질이 있는 등 다재다능했기 때문에 노부후사를 번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했고, 배다른 동생들과 매형, 여러 가신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쇼호(正保) 연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쇼호 소동' 혹은 '쇼호의 변'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에 노부후사나 그 측근이 직접 개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노부요시는 노부후사에게 일체 처벌을 가하지 않았고, 형으로서 아우를 신뢰했다고 한다.
1655년 형 노부요시가 사망하자 그 아들인 쓰가루 노부마사가 히로사키 번의 가독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노부마사의 나이가 겨우 13세였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노부마사가 번주직을 계승하는 대신, 노부후사의 보좌를 받고, 노부후사에게는 5천 석의 영지를 분할해 줄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1656년 2월, 노부마사는 상속을 허락받았고, 그해 봄 노부후사는 쓰가루로 돌아와 번의 후견인으로서 정치를 돌보게 되었다.[1] 그는 동생 쓰가루 노부타카(津軽信隆일본어) 등의 중신들과 함께 영지 선정에 나섰다. 원래 노부후사는 항구가 있는 아오모리(青森일본어)와 조상의 터전인 오우라(大浦일본어) 일대를 영지로 희망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구로이시(黒石) 지역의 2천 석, 히라나이(平内일본어) 지역의 1천 석, 그리고 고즈케노쿠니의 영지 2천 석, 도합 5천 석의 영지를 받아 고타이요리아이격 하타모토가 되었다. 이전에 받은 영지와 지급되던 봉록은 반납하였다. 공식 고쿠다카는 5천 석이나 실제 수확량은 1만 석을 넘었다고도 한다.[1]
구로이시에 정착한 노부후사는 가신단을 등용하고 마을을 정비한 뒤, 구로이시 진야를 재구축하였고 거리에 히로사키와 같은 상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점포 외관의 규제, 업종별 구획과 상인 초빙 등을 통해 상업의 융성과 도시 계획에 힘썼다. 이렇게 생겨난 분가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은 훗날 8대 당주 쓰가루 지카타리 때에 이르러 영지를 가봉받고 구로이시번으로 성장한다.[1]
노부후사는 고타이요리아이격 막부 하타모토, 히로사키 번주의 후견인, 구로이시 가문의 당주라는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그해 가을 에도로 돌아가 쇼군 가문에 곰 가죽 등을 헌상하고, 다시 히로사키와 구로이시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에도, 히로사키, 구로이시 세 곳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3]
1657년 히로사키 번 중역들에게 '쓰가루 가문 가훈'을 배포했고, 1661년 가신과 영지 백성들에게 도덕적이고 유교적인 내용의 '쇼핫토'(諸法度|쇼핫토일본어)를 제정하여 반포했다. 이는 법률이라기보다는 생활 규범 내지는 매뉴얼의 성격을 띠었다. 같은 해, 노부후사의 제안으로 히로사키 번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막부 말기까지 끊이지 않고 기록된 '히로사키 번청 일기'는 오늘날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1662년 노부마사가 16세가 되면서 노부후사는 구로이시로 돌아와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로 때문인지 구로이시 영지를 순찰하던 중 병으로 쓰러졌다. 히로사키 성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음력 9월 22일 43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당시 풍습과 달리 유교식으로 치러졌으며, 구로이시 진야 한쪽에 영묘를 세워 유해를 안장했다. 이 영묘는 1879년 구로이시 신사가 되었다. 가독은 장남 쓰가루 노부토시가 이었다.
2. 1. 출생과 배경
히로사키번의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의 둘째 아들로 에도의 번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마테히메(満天姫)였다.(할머니는 오다이노가타(於大の方), 친부는 시모사 세키야도 번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야스모토(松平康元)로, 이에야스에게는 씨다른 동생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나 마테히메가 아이가 없는 관계로 데려다 키웠다는 설도 있다.[2] 1631년, 형 노부요시와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하였다. 1642년, 23세의 나이로 막부의 고쇼구미(小姓組|こしょうぐみ일본어)로서 출사하여, 하타모토가 되었다. 도자마 다이묘 가문의 노부후사가 막부의 직책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형 노부요시로부터 1천 석의 영지를 받았다. 1645년, 막부로부터 봉록으로 쌀 300가마를 지급받고 쇼인반(書院番|しょいんばん일본어)에 임명되었다. 이후 슨푸로 출장을 가는 등 막부의 하타모토 경력을 쌓아갔다.2. 2. 막부 관료 시절
히로사키번의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의 둘째 아들로 에도의 번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마테히메(満天姫)였으나, 다른 사람이라는 설과 마테히메가 아이가 없어 데려다 키웠다는 설도 있다.[2] 1631년, 형 노부요시와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알현하였다. 1642년, 23세의 나이로 막부의 고쇼구미(小姓組|こしょうぐみ일본어)로서 출사하여 하타모토가 되었다. 도자마 다이묘 가문 출신인 노부후사가 막부의 직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형에게서 1천 석의 영지를 받았다. 1645년, 막부로부터 봉록으로 쌀 300가마를 지급받고 쇼인반(書院番|しょいんばん일본어)에 임명되었다. 이후 슨푸로 출장을 가는 등 막부의 하타모토 경력을 쌓아갔다.2. 3. 쇼호 소동
1631년 히로사키번의 번주가 된 쓰가루 노부후사의 형 쓰가루 노부요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고집불통 나으리'(じょっぱり殿様|조핫파리 도노사마일본어)라고 불렸고, 영지 내 평판도 좋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과 가신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노부요시를 강제로 은거시키고 노부후사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노부후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로 막부 관리로 일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야마가 소코에게 배우는 등 지식과 학식도 높았다. 무술과 문학에도 소질이 있는 등 다재다능했기 때문에 노부후사를 번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혹자는 노부요시의 고집스러운 면모가 동생 노부후사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했고, 배다른 동생들과 매형, 여러 가신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쇼호(正保) 연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쇼호 소동' 혹은 '쇼호의 변'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에 노부후사나 그 측근이 직접 개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노부요시는 노부후사에게 일체 처벌을 가하지 않았고, 형으로서 아우를 신뢰했다고 한다.2. 4. 구로이시 번 성립
1655년 형 노부요시가 사망하자 그 아들인 노부마사가 히로사키번의 가독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노부마사의 나이가 겨우 13세였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노부마사가 번주직을 계승하는 대신, 노부후사의 보좌를 받고, 노부후사에게는 5천 석의 영지를 분할해 줄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1656년 2월, 노부마사는 상속을 허락받았고, 그해 봄 노부후사는 쓰가루로 돌아와 번의 후견인으로서 정치를 돌보게 되었다.[1]한편 그는 동생 쓰가루 노부타카(津軽信隆일본어) 등의 중신들과 함께 영지 선정에 나섰다. 원래 노부후사는 항구가 있는 아오모리(青森일본어)와 조상의 터전인 오우라(大浦일본어) 일대를 영지로 희망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구로이시(黒石일본어) 지역의 2천 석, 히라나이(平内일본어) 지역의 1천 석, 그리고 고즈케노쿠니의 영지 2천 석, 도합 5천 석의 영지를 받아 고타이요리아이격 하타모토가 되었다. 이전에 받은 영지와 지급되던 봉록은 반납하였다. 공식 고쿠다카는 5천 석이나 실제 수확량은 1만 석을 넘었다고도 한다.[1]
구로이시에 정착한 노부후사는 가신단을 등용하고 마을을 정비한 뒤, 구로이시 진야를 재구축하였고 거리에 히로사키와 같은 상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점포 외관의 규제, 업종별 구획과 상인 초빙 등을 통해 상업의 융성과 도시 계획에 힘썼다. 이렇게 생겨난 분가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은 훗날 8대 당주 쓰가루 지카타리 때에 이르러 영지를 가봉받고 구로이시번으로 성장한다.[1]
메이레키 원년(1655년), 쓰가루 본가의 3대 번주 노부요시가 사망했지만, 막부는 그의 아들 노부마사가 젊다는 것을 이유로, 히로사키 번 계승에 대해 "노부마사는 당분간 노부히데의 보좌를 받을 것", "노부히데에게 5000석을 분할 지급할 것"의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2] 이는 노부히데의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데 반해, 본가는 노부요시의 어머니인 다쓰히메가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이라는 가계인 것과도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
2. 5. 1인 3역과 사망
노부후사는 고타이요리아이격 막부 하타모토, 히로사키 번주의 후견인, 구로이시 가문의 당주라는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그해 가을 에도로 돌아가 쇼군 가문에 곰 가죽 등을 헌상하고, 다시 히로사키와 구로이시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에도, 히로사키, 구로이시 세 곳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3]1657년 히로사키 번 중역들에게 '쓰가루 가문 가훈'을 배포했고, 1661년 가신과 영지 백성들에게 도덕적이고 유교적인 내용의 '쇼핫토'(諸法度|쇼핫토일본어)를 제정하여 반포했다. 이는 법률이라기보다는 생활 규범 내지는 매뉴얼의 성격을 띠었다. 같은 해, 노부후사의 제안으로 히로사키 번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막부 말기까지 끊이지 않고 기록된 '히로사키 번청 일기'는 오늘날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1662년 노부마사가 16세가 되면서 노부후사는 구로이시로 돌아와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로 때문인지 구로이시 영지를 순찰하던 중 병으로 쓰러졌다. 히로사키 성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음력 9월 22일 43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당시 풍습과 달리 유교식으로 치러졌으며, 구로이시 진야 한쪽에 영묘를 세워 유해를 안장했다. 이 영묘는 1879년 구로이시 신사가 되었다. 가독은 장남 쓰가루 노부토시가 이었다.
3. 통치 철학과 업적
쓰가루 노부후사는 막부와 여러 다이묘들 사이에서 인품, 지식, 학식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야마가 소코에게서 병학과 유학을 배웠으며, 어린 번주 노부마사와 그의 형제들에게도 이를 가르쳤다. 무술에 있어서는 검술 일도류 외에도 창술, 궁술, 마술을 연마했고, 문학을 비롯한 여러 재주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형 노부요시는 "고집불통 영주"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방약무인한 행동을 보였는데, 이는 뛰어난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형은 노부후사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3. 1. 구로이시 번 통치
1657년, 히로사키 번의 중역들에게 '쓰가루 가문 가훈'을 배포하였고, 1661년에는 도덕적이고 유교적인 내용의 '쇼핫토'(諸法度|제법도일본어)를 제정하여 가신과 영지 내 백성들에게 반포하였다.[3] 그 내용은 법률이라기보다는 생활규범 내지는 매뉴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그의 제안으로 히로사키 번에서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막부 말기까지 끊이지 않고 기록된 '히로사키 번청 일기'는 오늘날에도 전해져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노부후사는 구로이시가 아닌 다른 영지를 원했다고 전해지는데, 항구가 있는 아오모리나 쓰가루 씨의 조상 땅인 오우라성 주변을 원했다고 한다.[3] 구로이시에 들어온 후에는 가신단을 고용하는 동시에, 구로이시에 있던 마을을 개편하고 구로이시 진야(구로이시성)를 재구축했다. 마을에 고미세라고 불리는 아케이드(홍전에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짐)를 만들고, 점포 외면에 규제를 실시하거나, 업종별로 구획을 나누고, 상인을 불러들이는 등, 도시 건설과 산업 진흥에 힘썼다. 이 구로이시 번은 에도 시대 말기에 가증되어 1만 섬을 넘은 이후 정식으로 다이묘가 되었지만, 노부후사의 시대에 이미 실고에서 1만 섬을 넘었다고도 한다.
1662년, 노부마사가 16세가 되면서 노부후사는 구로이시로 돌아와 안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로 때문인지 구로이시 영지 내를 순찰하던 도중 병으로 쓰러졌다. 히로사키 성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 못하고 9월 22일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당시의 풍습과는 달리 유교식으로 치러졌으며 구로이시 진야 한쪽에 영묘를 세워 그 유해를 안장했다. 영묘는 1879년에 구로이시 신사가 되었다.
3. 2. 유교적 통치 이념
1657년 히로사키 번 중역들에게 '쓰가루 가문 가훈'을 배포했고, 1661년에는 도덕적이고 유교적인 내용의 '쇼핫토'(諸法度|제법도일본어)를 제정하여 가신과 영지 내 백성들에게 반포했다. 이 쇼핫토는 법률이라기보다는 생활 규범 내지는 매뉴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3] 같은 해, 그의 제안으로 히로사키 번에서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막부 말기까지 끊이지 않고 기록된 히로사키 번청 일기는 오늘날에도 전해져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3. 3. 히로사키 번청 일기
1661년 쓰가루 노부후사의 제안으로 히로사키 번에서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막부 말기까지 매일 빠짐없이 기록된 《히로사키 번청 일기》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3] 이 일기는 6월 3일부터 쓰기 시작했다.[3]4. 평가
쓰가루 노부후사는 막부와 여러 다이묘들 사이에서 인품, 지식, 학식으로 좋은 평판을 받았다. 야마가 소코에게 병학과 유학을 배웠으며, 어린 번주 노부마사와 그의 형제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검술 일도류 외에도 창술, 궁술, 마술 등 무술에도 능했으며, 문학과 기타 여러 재주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형인 노부요시는 '고집불통 영주'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방약무인한 행동을 보였는데, 이는 뛰어난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형은 노부후사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1]
5.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쓰가루 노부후사 | |
어머니 | 만텐히메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마쓰다이라 야스모토의 딸[4] |
정실 | 야마구치 나오가타의 딸 | |
장남 | 쓰가루 노부토시 | |
차남 | 쓰가루 노부즈미 |
6. 기타
- 1879년(메이지 12년), 옛 진야 내에 있던 신영 영묘를 옮겨 구로이시 신사로 모셨다.
- 2005년, 신영의 구로이시 지행 350주년을 기념하여 구로이시 신사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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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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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설
[2]
기록
[3]
주장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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